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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이 탈환되자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대부분의 유럽귀족들이 귀국하게 되면서 상비군이 없는 예루살렘공국을 위해 여러 기사단이 창립되어 아랍인들에게 쫓겨나기 전까지 치열한 전투를 벌이게 됩니다.
막강한 템플기사단이 프랑스로 후퇴했다가 이들의 재산을 탐낸 필립왕에 의해 몰살된 거와는 달리 성요한기사단은 현명하게 로도스섬으로 탈출하여 본연의 임무를 그대로 수행했기에 지속할 수 있었습니다. (템플기사단은 국제은행역할을 하면서 상인들과 거래하고, 각종 기부금이 더해져 막강한 부를 가지게 되자, 1차타겟이 된 거죠)
터키의 슐레이만대제는 42년전에 젊은 시절 이들을 포위공격중 명예로운 항복을 인정해서 로도스섬을 떠나는 것을 허락했습니다. 1530년 신성로마제국의 칼5세는 터키의 위협을 알았기에 이들에게 몰타섬을 임대해주고는 세금으로 매년 사냥용 매 한마리씩을 바치도록 합니다.
 

로도스섬과 달리 황량하기 그지없는 몰타섬에 배치되자 각종 불만이 쏟아졌지만, 후보지로 생각하던 트리폴리가 1551년 터키군에 함락되자 마음을 굳히고, 방어용 성곽구축과 갤리선을 이용한 터키함선에 대한 약탈에 집중합니다.
 

1551년 터키의 해적대장 드라굿(Dtagut)이 섬에 상륙해서 약탈을 일삼고 전초전을 치룬후 철수하자 항구에 인접한 만에 요새를 건설합니다.
St. Elmo요새 – 단단한 암반위에 자리잡은 별모양의 요새인데, 단점은 연약한 석회암으로 만들어져서 이를 보강키 위해 외각에 깊은 해자를 파고, 높은 보루를 만들었습니다.
슐레이만대제가 평소에 기사단을 제거할 계획을 갖고있었지만 마음을 굳힌 계기는 자신의 사랑하던 딸인 미흐마가 하렘의 여러 동업자들과 함께 투자하여 베니스로부터 구매한 비싼 사치품을 운송중이던 갤리선이 기사단에 약탈당하고 자신의 유모가 볼모로 잡히자 아버지에게 탄원을 합니다.
또한 이스탄불 모스크의 성직자들이 설교중에 포로가 된 이슬람교도들을 개처럼 묶어서 노잡이로 써먹는 기독교 기사단을 그냥 두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하자, 슐레이만대제는 군사회의를 열고는 출병을 결의합니다.
만일 몰타섬을 얻으면 과거 자신이 관대하게 봐주었던 실수를 만회하고, 훌륭한 항구를 기반으로 스페인, 이태리반도를 마음껏 노릴수 있다고 계산했습니다.

                               터키군 지휘부
무스타파 파샤
술탄과 나이가 같은 육군사령관으로 예언자 마호멧의 기수역할을 했던 귀족집안의 후손으로 기독교들에게 적대심을 가지고 있었고 잔인함으로 악명이 높았습니다.
승리를 자신했기에 보급품을 턱없이 부족하게 가져갔습니다.

피알리 파샤
해군사령관으로 출생이 남달랐습니다.
1530년 베오그라드 원정에 나선 슐레이만대제에게 버려진 아이로 발견되어서 그후 하렘에서 성장을 하게 되고 정식교육을 받고는 드라굿의 밑에서 해군으로 활동하게 됩니다.
슐레이만대제의 손녀딸과 결혼해서 출생의 결점을 커버합니다.
(작전 내내 소극적인 함대운용으로 육군사령관인 무스타파 파샤와 갈등을 만들고, 결국 2명사이의 의견불일치는 터키군 패배의 제1 원인이 됩니다.)

드라굿 라이스 (Dragut Rice)
1485년에 아나톨리아에서 소작민의 아들로 출생했지만 지방총독이 그의 총명함을 알아보고는 이집트로 데리고 가서 교육시키고 맘루크병으로 복무하게 합니다. 그 후 해적대장인 바르바롯사의 총애를 받으면서 출세하기 시작하여 1545년 그의 사망이후 뒤를 잇게 됩니다.
자비로운 성품과 뛰어난 지략으로 인해 적들로부터도 찬탄을 받는 명실상부한 최고의 지휘관이었습니다. 그는 고문관으로 몰타섬 작전을 총지휘하였고, 만일 그가 끝까지 살았으면 승리가 가능 했을 겁니다.
                     기사단장
발렛테(Valette)
1494년 프랑스 프로방스귀족의 아들로 태어나서 20살에 조상들의 뒤를 이어서 기사단에 입문합니다.
로도스섬 함락이후 갤리선을 이끌면서 전투를 하던중 일생일대 단 한번의 패배로 부상을 당해 포로가 되어서 노잡이로 전락하게 되는데, 알몸으로 사슬에 묶인채 종일 노를 젓고, 음식이라고는 포도주에 젖힌 빵조각만을 먹으면서 몇 년을 버티다가 포로교환으로 석방되었기에 강한 의지력을 보유하였습니다.
이 시절의 경험으로 터키어에 능숙했고, 드라굿 라이스 (Dragut Rice)를 잘 알게 됩니다.
그 후 해전에서 자신을 사로 잡았던 터키의 Kurst Ali와 다시 전투를 벌이고 승리하자, 잡은 포로들을 순수히 보내줍니다.
그 후 계속 승진을 하여 1557년에 만장일치로 기사단장에 임명됩니다.

터키군의 구성 약 4만명 (2차례 파견된 지원병 포함)
예니체니군단 – 6,300명, 설명은 생략
 
Iayalars – 3,900명, 이슬람 광신도들도 단지 칼로 무장하고 돌격전에 마약을 복용하여 무모한 돌격을 감행하는 것이 습관
Spahis – 9,000명, 주로 기병이지만 가장 중심이 된 부대
징집병 – 6,000명, 주로 변절한 동방기독교인과 유대인들로 구성
터키군은 갑옷대신 두터운 실크옷을 입었기에 후일 기사단의 화염공격으로 큰 피해를 봅니다.
기사단의 구성
청빈, 순결, 복종을 강조한 막강한 전투집단이지만 700명으로 숫자가 적었습니다.
이들의 갑옷은 매우 뛰어났지만, 여름의 고열아래 전투중 열사병으로 사망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일부는 최근에 개발된 막시밀리안 갑옷을 착용했습니다. – 훨씬 경량의 견고한 갑옷-
기사단에 복무하는 사병들과 현지군인, 용병을 전부 합치면 약 8,500명이었습니다.
이들은 대부분 화승총으로 무장하였습니다.
해적들의 잦은 침입으로 현지주민 대부분이 노예로 잡혀갔기에 남은 주민들은 터키군에게 강한 적개심을 가지고 기사단에 적극 호응합니다.
(전투에 소극적인 로도스섬의 그리스인들과 전혀 달랐기에, 초기에 같은 아랍계언어와 혈통을 지닌 이들의 지원을 바랬던 터키군은 당황하게 됩니다.)
각기 다른 언어를 구성하는 8개의 부대로 구성합니다.
영국의 헨리8세가 카톨릭과 결별하자 대부분의 기사는 떠나갔고, 오직 올리버 스타키 기사한명만 남아있었지만 한때 막강했던 구성원들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그대로 조직을 남겨둡니다.

터키군의 상륙
5월 18일 약 200척의 함선으로 섬 서편의 만에 머물다가 적절치 못한 것을 깨닫고는 몇일후에 기사단 요새근처 마르사시로코만에 침공부대를 상륙시킵니다.
발렛트는 즉시 시칠리섬의 총독에게 구원군 파견을 요청하는 쾌속정을 보냅니다.
  

Mdina - 가장 오래된 도시이며 수도로 고지대에 위치하여 낡은 성곽으로 보호되었으며 기사단의 기병대가 위치하여 정찰 및 연락임무를 수행했지만 병력이 적어서 방어력이 취약했습니다.

터키 전위부대 기습공격도중에 프랑스의 Riviere기사가 사로잡히고, 혹독한 고문을 받자, 가장 방어가 완벽한 Birgu 주변의 카스틸(Castille)보루 성곽이 가장 약한 곳이라고 허위자백을 합니다.
무스타파 파샤는 순진하게 이를 믿고 군대를 보내자, 발레트는 처음으로 공격군을 내보내서 터키군을 격멸하는데 성공하고 기사단의 피해는 전사 21명, 부상 150명이었지만, 터키군은 300명이 사망합니다.
포획물중에는 이슬람장교의 팔보호구가 있었는데 여기에 새겨진 문자는 ‘나는 부와 명예가 아닌 영혼의 안식을 찾기 위해 여기에 왔다.’라고 써있었습니다.
분노한 무스타파는 프랑스의 Riviere기사에게 태형을 가해 죽입니다.
피알리 제독은 먼저 Mdina와 북부지방을 점령하자는 무스타파의 의견을 거절합니다.
터키군에 있던 2명의 기독교병사가 탈출하여 발렛트에게 함선의 안전만을 걱정하는 피알리제독과 무스타파의 갈등 그리고 고립된 St. Elmo요새의 방비가 가장 허약하다고 파악한 사실을 보고합니다.
즉시 발렛트는 이태리에서 귀국한 Massuez에게 64명의 기사를 이끌고 지원 나갈 것을 명하고 St. Elmo요새가 첫번째 공격이 될 것임을 알았기에 방어군은 총 600명으로 구성됩니다.
공격을 준비하던 터키군에게 있어서 최대의 난관 : St. Elmo요새를 마주보는 Sciberas언덕은 포대를 설치하는 완벽한 곳이었지만, 단단한 암반이어서 참호조차 팔 수가 없었습니다.
무스타파는 언덕중턱에서 흙을 날라서 포진지를 구축합니다.
5월 24일 막강한 포격이 개시됩니다.
포격술의 대가들이었기에 점차 요새는 허물어지고, 저격병이 배치되어서 틈새사이로 움직이는 기사단에게 무차별 사격이 가해집니다.
발렛트에게 시칠리 총독에게서 답변이 왔는데, 대규모 병력을 모으는데 시간이 걸릴 거라는 소극적인 대답이었습니다.
또한 St. Elmo요새로부터 일부 기사단원들이 와서 완전 포위되면서 포격을 받아 오래 버틸수 없다는 탄원을 듣자, 발렛트는 그들에게 복귀하지않아도 되고, 자신과 특공대원들이 그들을 대신하여 싸울 거라고 말합니다.
수치심에 사로잡힌 기사단원들은 복귀하고, 자원병들도 일부 지원하여 죽을 것이 뻔한 St. Elmo요새로 향합니다. 아직 완벽한 포위가 안되었기에 밤마다 부상병후송과 대체병력이 보트로 운송됩니다.
피알리제독이 포탄 파편에 부상하여 육지의 텐트에서 쉬고있는 사이에 사건이 일어납니다.
아프리카해안으로 정찰을 나갔던 Aubin기사가 이끄는 갤리선이 봉쇄당한 항만으로 진입을 합니다. 대담한 행동에 당황한 터키군은 6척의 갤리선을 보내서 추격하고, 결국 이들을 피해 달아나던 기사단 갤리선은 끝까지 따라온 터키갤리선에 대항하여 한편의 노를 쉬게 하고, 반대편의 노를 힘껏 저어서 180도 회전하여서 반대로 터키갤리선을 공격하다가 결국 시칠리섬으로 도망가는데 성공하자, 피알리제독은 분노합니다.
5월29일 새벽에 총소리가 요란하게 울렸습니다.
St. Elmo요새로부터 몰래 기사단원들이 도개교를 내리고 터키군지역으로 침투하여 포위참호를 파는 인부들과 전초부대원들을 몰아내는 것을 보자 무스타파 파샤는 급히 예니체니군단을 급파합니다.
포연이 걷히자 흰색의 예니체니군단이 내부성곽을 포위하는데 성공합니다.
다음날 St. Elmo요새의 기사들은 다가온 터키함선들이 차례로 한척씩 포격을 하고는 함대진열에 가담하는 것을 보게 되는데 이는 터키군 최고사령관인 드라굿이 온 것을 기념하는 의식이었습니다.
전선시찰을 마친 그는 무스타파의 의견대로 섬북부와 Mdina를 함락시키고 포위전을 하면 St. Elmo요새는 저절로 굴러올 것을 지적하고는 요새가 끝까지 버틸수 있는 이유가 주변 요새로부터의 보급임을 알아채고는, 방지책으로 St. Elmo요새를 바라보는 모든 주변부에 포병을 배치하고는 St. Elmo요새의 외곽을 모두 점령할 것을 명합니다.
그사이에 Mdina에 위치한 기사단의 기마병들은 기습을 하여 터키군 본진과 보급부대, 포병진지를 파괴합니다.
6월 6일 새벽 터키군 정찰병들은 우연히 St. Elmo요새 외곽보루에 있던 수비병들이 모두 잠든 것을 발견하고는 지원병들을 급히 부릅니다.
무스타파는 예니체니군단을 보내서 공격하고 이에 밀린 수비군은 철수하다가
외곽보루와 성곽을 연결하는 내리닫이 격자문을 사이에 두고 격전이 벌어집니다.
여기서 기사단은 최후의 무기를 사용합니다.
Greek Fire – 최대 27미터까지 던질 수 있는 도자기속에 인화성물질을 넣은 일종의 화염병
Trump – 원시적인 화염방사기
Firework Hoop – 인화물질을 흡수한 가벼운 나무에 울을 둘러싸서 화약가루와 인화물질로 코팅한 후 사람에게 던져서 불붙게 하는 무기
결국 예니체니군단은 2,000명의 사상자를 내고, 기사단은 10/70명의 사상자가 난후 전투는 종료됩니다.
외곽 보루를 점령했기에 더욱 많은 대포를 전면에 배치하면서 터키군은 다음 공격을 준비했고, 전투를 마친후 귀환한 기사단이 저녁에 예배당에 기도를 하러 갔을 때, 그날 중상을 입은 기사 한명이 제단앞에 기어간후 쓰러져 죽어있는 모습을 보고는 자신들의 운명을 즉감하게 됩니다.

다음날 다시 공격이 시작되고, 성곽전체가 포격으로 허물어집니다
예니체니군단이 진격의 선두에 나서지만 어제와 마찬가지로 화염세례를 받으면서 비명을 지르는 동료들을 남겨둔 채 후퇴합니다.
그날 저녁 St. Elmo요새 기사단의 지휘부는 곧 함락되리라 예상하고 대표자인 Medran을 보내서 자신들의 위험을 기사단위원회에 알리기로 합니다.
그는 요새를 폭파하고, 기사들을 대피시킬 것을 주장했지만, 발렛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시칠리 총독은 6월 20일까지 지원군을 보내되, 반드시 St. Elmo요새가 버티고 있어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우리들은 기사단에 입단할 때 신념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결의했고 이제는 희생을 해야할 때이다.
구원군을 기다리겠지만, 우리들의 위치를 끝까지 지켜서 적들에게 최후까지 우리가 싸운다는 것을 보여주어야만 한다.’
이는 사형선고나 다름없었지만 Mdina요새에서 온 15명의 기사와 50명의 병사들도 합류하여 다시 St. Elmo요새로 출발합니다.
요새에서는 기사단장이 파견한 3명의 대표단이 있었는데, 마지막 기사대표인 Castriota는 충분한 보급과 인원충원이 있다면 더 버틸 수 있다고 주장하여 남은 기사단원들이 반란이라도 일으킬 듯이 흥분하지만 그는 Birgu반도로 돌아가서 지원병모집을 주장하고 600명을 모집합니다.
전령이 다시 St. Elmo요새로 파견되어 아래와 같이 발렛트의 편지를 읽습니다.
‘600명의 자원자들을 선출하였기에 목숨이 아까운 자들은 성당으로 들어가도 좋다.’
이 말을 듣고는 아무도 거역할 수 없었고, 수영을 잘하는 전령이 급히 본진에 파견되어 구원군이 필요없다고 통보를 했지만 그날 저녁에도 15명의 기사와 100명의 병사들이 파견됩니다.
드라굿은 여태까지 공격이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St. Elmo요새를 고립시키기 위해 만들었던 Gallow포인트의 포병진지가 기사단기병대에 파괴된 사실에 실망했지만 다시 이들 진지를 복구하여 다시 St. Elmo요새를 고립시키고는 공격을 개시합니다.
6월 10일 종일 포격이 이어지고 저녁에 화염무기로 무장한 터키군은 야습을 합니다.
양편이 쏟아내는 화염으로 대낮같이 밝아졌지만 기사단은 피해가 적었습니다
갑옷으로 보호되고, 진지 옆에 물통을 두고, 불이 붙으면 재빠르게 뛰어들어서 불을 껏기에
통닭구이 신세가 된 터키군과 달리 양측의 피해규모는 1,500/60으로 큰 차이가 납니다.
-   터키군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과감하게 공격한데에는 율법학자들의 설교 때문입니다.
   성전에서 전사시에는 천국으로 가서 시원한 야자나무 그늘아래 예쁜 여자들의 시중을
   받으면서 영원을 누리게 된다는 거죠. –
6월 16일 다시 공격이 개시되고, 이번엔 전면에 dervish(탁발승부대)와 Iayalars를 내보내서 소모시킨 후에 몇일 전 사령관이 전사하여 복수심에 불타는 예니체니군단을 마지막으로 내보냅니다.
무스타파 파샤와 드라굿이 직접 나서서 지휘를 했지만 St. Angelo요새로부터 쏟아지는 포탄으로 인해 철수를 하게 되고 다시 1,000명의 사상자가 납니다.
그날 해안가에는 시칠리총독의 나태함에 지쳐서 일찍 출발한 2척의 기사단 지원함이 상륙을 시도하다가 무리임을 알고는 일단 철수합니다.
다음날 터키군 전투회의에서 드라굿은 St. Elmo요새를 완전 고립시켜서 보급을 차단하고 남편의 성곽에서 쏟아지는 포탄에 피해가 컸기에 여기를 완전 점령할 것을 명합니다.
이를 위해 근처까지 참호를 파나가게 하고, 6월 18일 이를 직접 보기위해 전선시찰을 나갔다가 화려한 옷차림이 금방 St. Angelo요새 기사단에 띄어서 대포사격을 받습니다.
대포의 첫발은 바윗돌을 맞추고, 이 파편 하나가 터번을 쓴 드라굿의 머리에 명중하여 눈과 코로 피를 쏟으며 쓰러집니다.
두번째 포탄은 예니체니군단 지휘관에 명중합니다. 무스타파는 침착하게 자신의 텐트로 드라굿을 옮깁니다.
 
(드라굿은 자신의 동생이 전사한 이 섬에서 ‘죽음의 그림자가 나에게 드리워져 있고, 기사단의 영토에서 전사할거 같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다음날 St. Angelo요새의 탄약고 하나가 폭발하여 기사단 6명이 죽는 사고가 있었고, 평소와 같이 무스타파 파샤는 전선에서 회의를 열고 이를 본 St. Elmo요새 지휘관인 Grugno가 포격을 가해서 예니체니군단 포병사령관이 전사합니다. 즉시 터키의 저격병이 사격을 가해 Grugno는 병원으로 실려가고, 그날 저녁 Miranda기사는 곧 St. Elmo요새가 함락될 거라는 메시지를 보냅니다.
다음날 저녁 보충병력을 보내는 것은 전멸되는 것을 의미하니, 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또 다시 보냅니다.
발렛트는 지원부대를 보냈지만, 터키군의 맹포격으로 되돌아와야 했습니다.
6월21일은 성체축일로 비록 포위중이었지만, 기사단은 정장을 입고 시가행진후 St. Elmo요새의 동지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야간에 성벽주위로 터키군 저격병들이 배치되어 St. Elmo요새는 완전 고립됩니다.
6월22일 터키군이 너무나 근접했기에 St. Angelo요새는 아군의 피해를 우려해서 포격을 할 수가 없었고, 성벽이 점차 무너지자 St. Elmo요새로 물밀듯이 침투하는 터키군과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지게 됩니다.
 
기사단은 대포를 가지고 와서 겨우 저지를 하지만, 지휘관인 Montserrat은 전사합니다.
6시간의 전투후에 기사단은 200명을 잃고 터키군은 다시 철수하고, 최후가 온 것이 분명해지자, 군목은 병사들의 최후고백을 듣고는 마지막예배를 올리고는 교회현판을 떼어내서 땅속에 묻고, 성배들을 앞마당에 쌓아놓고 불을 질렀습니다.
6월23일 새벽 피알리의 갤리선들이 St. Elmo요새로 다가오면서 전투가 시작되고, Guras는 부상당해서 의자 위에 앉아서 창을 휘두르다 목이 잘리고, Mas는 문자 그대로 산산조각이 납니다.
 
나머지 기사들은 성당앞에서 전멸당하고, 한명이 함락을 알리는 마지막 불꽃신호를 올립니다.
9명의 기사들이 포로로 잡혔지만, 그 후로 소식이 끊깁니다.
(아래의 처형방법은 Impalement on stake'로 터키군에게 배운 왈카키아공국의 브라드4세가 가장 즐겨 사용하게 됩니다. 이보 안드리치 '드리나강의 다리'를 읽어보면 자세히 나오는데, 나무를 뾰족하게 깍은후에 기름칠을 하여 수형자의 주요 장기를 피하여 꽂게 하면 몇일간 고통속에 생존합니다.)
 

겨우 5명의 몰타 현지병사들이 절벽에서 뛰어내려 수영으로 Birgu로 건너가는데 성공합니다.
이 요새점령에 터키군 손실은 8,000명/ 기사단은 1,500명(그중 기사 130명)으로 차이가 많이 났고, 말라리아, 이질, 부상으로 인하여 터키군 병원은 수천명이 넘쳐나고 있었습니다.
함락직후에 무스타파는 드라굿에게 승전의 소식을 전하고, 그는 눈을 뜨고 이 소식을 듣자 마자 사망합니다.
무스타파는 건너편의 St. Angelo요새를 쳐다보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알라신이여, 이렇게 작은 요새에 큰 희생을 치뤘는데, 더 큰 요새에 앞으로 얼마나 더 큰 희생을 치뤄야 합니까?’

발렛트는 포위가 시작되기전 요새내의 모든 애완견을 사살했고, 이삭이 여문 보리를 베어서 비상식량으로 확보했기에 식량에는 큰 문제가 없었습니다.
성요한의 기념일에 맞춰 축포를 쏘고, 평소와 다름없는 축하행렬을 벌이자, 이를 바라본 터키군은 점차 회의적인 생각이 들게 됩니다.
6월 24일 오전에 St. Angelo요새의 기사들은 살해당한 동료들의 머리와 십자가에 못박힌 벌겨벗겨진 몸체가 해안가에 떠내려온 것을 보게 되고, 발렛트도 그의 비서인 Starkey(단 한명 남은 영국기사)와 그 광경을 보고는 분노하여 터키군포로들의 목을 잘라서 대포로 터키군 진지로 쏴 보냅니다.
발렛트는 기사들에게 일장 연설을 합니다
‘전투중 전사하는 것은 진정한 기사이며, 신념을 지키는 것이 기사단의 의무이며 
St. Elmo요새에서 희생당한 형제들은 터키군에게 좌절을 안겨주었으며, 강력한 성채를 가진 우리는 더욱 승리할 수 있음을 확신한다.’
St. Elmo요새가 함락한 당일 시칠리 총독이 마지못해 보낸 2척의 시칠리 함선과 2척의 기사단함선이 도착합니다. 여기에는 42명의 기사와 600명의 병사들이 있었는데 함선사령관은 총독으로부터 St. Elmo요새가 함락될 경우에 상륙을 금지 받았지만, Roble기사의 계략에 넘어가서 결국 상륙에 성공하게 됩니다.
때마침 안개가 끼었기에 터키군에 걸리지않고 Kalkara creek해안가에 도착하여 미리 대기한 기사단의 보트를 타고 무사하게 Birgu에 도착합니다.
무스타파는 로도스섬에서 슐레이만대제가 제안했던거와 마찬가지로 명예로운 항복을 제안하기로 하고, 보복을 우려해서 기독교인 노예를 시켜 보냅니다.
눈이 가려진채 도시로 들어온 노예는 발렛트에게 이를 설명하자, 발렛트는 간단하게 교수형에 쳐하라고 명합니다.
다시 눈이 가리워진채 공포에 질린 노예는 성채앞에서 안대가 풀리고, 높이 솟은 막강한 성채를 보게 되면서, 발렛트의 답변을 듣습니다.
‘네 주인에게 말하거라, 이 영토는 오직 예니체니군단의 시체로 매워야지만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는 도열한 기사단과 무기들을 보여주고는 눈을 가리운 채 돌려보냅니다.
 
무스타파는 이 같은 처사에 크게 분노하여 기사단을 몰살시키기로 결심합니다.
십자포화를 쏟아 붓기 위해 점령한 St. Elmo요새 곳곳에 포대를 배치합니다.
이때 기사단은 건너편 점령지에서 터키장교한명이 손을 흔드는 것을 보고는 보트에 타서 접근합니다.
터키병사들이 그에게 뛰어가고, 장교는 물속에 뛰어들어서 기사단에 구조된 후 발렛트앞에서 귀순이유를 밝히게 되는데, 비잔틴황실의 후손으로 개종한후 장교로 복무하다가 영웅적인 기사단의 전투를 보고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서 귀순했다고 밝히고는 터키군의 작전계획을 실토합니다.
St. Michel요새에 터키군의 공격이 집중될 것이며 반도주변으로 상륙작전이 개시될 것이라는 새로운 정보를 제공합니다.
발렛트는 Senglia반도 주변 해안에 방어용 말뚝을 물속에 박아 넣고 사이에 체인을 연결하는 작업을 몰래 9일간 밤마다 하여 완성합니다.
무스타파는 이 장치들을 제거하기 도끼를 쥔 수병들을 보냈으나 수영을 훨씬 잘하는 몰타 현지 군인들에게 격퇴당하고, 보트를 보내서 닻을 내리고는 몇 개의 말뚝을 뽑는데 성공했지만 곧 반격에 의해 닻줄이 끊기고 곧바로 수리가 되는 바람에 쫓겨 납니다.
이때쯤 드라굿의 사위이며 알제리총독인 Hassem이 지원군을 이끌고 도착해서는 전선시찰을 해보고는 여지껏 점령이 안된 것은 용기가 없는 공격탓이라고 말하고는 자신이 한번 해보겠다고 주장하자, 무스타파는 즉각 승인합니다.
7월15일 부관인 Candelissa가 해상공격을 맡았고, 선두에 이맘(이슬람 성직자)이 선도하는 보트3척과 수많은 작은 보트에 터키/알제리 병사들이 탑승하여 전진했지만 미리 설치된 말뚝에 걸려서 꼼짝 못하게 되자 배에서 내려서 방패로 머리를 가리고는 물을 건너서 성곽으로 돌진합니다. 공격으로 많은 병사가 쓰러졌지만 성곽을 타고 오르기 시작합니다
이와 동시에 Hassem이 이끄는 군사들은 사다리를 타고 육지에서 성곽공격을 개시합니다.
이때 화약폭발과 함께 성곽일부가 무너지자 이틈으로 터키군이 물밀듯이 쏟아지게 되고, 기사단은 이를 막기위해 증원군을 보냅니다.
이를 바라본 무스타파는 St. Michel요새 서쪽과 남쪽의 치열한 공방전의 틈을 이용해서 10척의 보트에 각 100명의 예니체니군단을 탑승시켜 북동편의 해안에 상륙시키기로 하고 배를 출항시킵니다.
하지만 St. Angelo요새의 Guiral 기사는 두 요새 사이의 틈을 지키기 위해 미리 St. Angelo요새 최북단에 대포를 몰래 배치하여 지금껏 숨기고 있었습니다.
180미터쯤 접근하자 5대의 대포가 체인, 산탄, 막대기탄환을 발사하여 단 한척만 남기고 모두 격침시킵니다. 800명이 전사했습니다.
 

한편 St. Michael요새에서는 5시간의 전투끝에 지친 터키군이 철수를 시작하자 St. Michael요새의 문을 열고는 추격을 개시하여 남김없이 사살합니다.
이때 전사한 기사단원중에는 시칠리총독이 지원을 약속하면서 남겨둔 그의 아들도 있었는데, 그는 발레테의 개인적 보호에도 불구하고 몰래 전투에 참가했다가 포탄에 산산조각이 나면서 그의 갑옷파편하나가 옆의 기사를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날 전투의 손실은 각각 250/3,000명이었고, 밤이 되자 몰타섬 주민들은 성벽에서 내려와서 터키군 장교들 시체와 무기에서 금은보석을 걷어냅니다.
무스타파는 다음 공격을 준비하면서 두개의 요새를 완전포위하기 시작합니다.
발레테는 St. Angelo요새의 북방해안인 Kalkara Creek에 바윗돌을 가라앉히고, 체인으로 연결하여 상륙전에 대비하고는 터키포로들로 하여금 시가전에 대비하여 시내에 돌로 바리케이트를 쌓게 시켰는데, 이 과정에서 많은 포로들이 터키군의 포화에 쓰러집니다.
(사진은 왼편의 점령한 St. Elmo요새에서 맹포격을 하는 모습)
 

그후 몇일간의 집중포격과 돌격이 뒤따르고, 8월7일 터키군은 Castille 보루 주변에 빈틈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돌격하지만 곧바로 내성이 그들을 막고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온갖 화염무기와 화승총으로 수백명이 몰살되고, 학살이 끝나자마자 기사단은 추격을 하지않고, 곧바로 무너진 성벽을 복구합니다.
동시에 공격중이던 St. Michael요새에서는 터키군이 거의 승리하려는 순간이었고 마지막으로 예니체니군단을 투입했지만, 갑자기 퇴각 나팔이 울리면서 후퇴를 하게 됩니다.
이유는 기사단의 기습덕이었는데, Mdina에 위치한 기사단지휘관은 아침부터 울리는 엄청난 대포소음에 대공세임을 짐작하고는 터키본진의 방어가 허술할 것을 예상하고, 휘하의 모든 기병들을 몰래 접근시켜서 돌격시켰습니다.
텐트를 불지르고, 부상병들을 학살하고, 말들을 나포하거나 병신으로 만들고는 재빠르게 후퇴합니다.
귀환한 무스타파는 상황을 깨닫고는 굳게 결심합니다. 기사들을 전부 죽이고 기사단장만 생포해서 사슬로 묶은후에 콘스탄티노플로 압송하겠다고..
한편 시칠리총독은 이달말까지 16,000명을 보내겠다고 편지를 보내지만 기사단은 더 이상 믿지 않고 아래와 같이 결의합니다.
‘이제는 신의 은총이외에는 믿을 것이 없다. 만일 지휘부가 쓰러지더라도 기사단의 명예를 위해 끝까지 싸워라 혹시라도 적의 손에 잡히면 St. Elmo요새의 동료들같이 비참한 대우를 받을 것이니, 전투중에 죽는 편이 낫다.’
또한 전투중 전사하는 사람에게는 완전한 면죄부가 부여될 거라는 교황의 교서가 발표되자 섬주민들까지 이에 동조하여 끝까지 저항을 결의 하게 됩니다.
발렛테는 시칠리총독에게 답장을 썼는데, 그에게 지원병 독촉대신 시칠리섬에 남아있는 기사단에게 속히 복귀하여 본진이 무너지기전에 전투에 참여하기를 명령했습니다.
무스타파는 전통적인 공성전을 준비하여 첫번째 목표인 Castille보루를 향하여 공격용타워를 내보내고, 땅굴을 동시에 파기로 했습니다.
 
(이당시의 땅굴작전은 성밑에 땅굴을 파서 침목으로 받침대를 만든 후에 폭발시키면 땅이 꺼지면서 성도 무너지게 됩니다.)
이집트공병대를 이용해서 땅굴을 팠고, 이를 기사단도 예의주시 했습니다.
무스타파는 작전계획을 수립했는데, 먼저 Senglia를 공격하여 Castille보루의 병사들이 이곳으로 지원을 나가게 되면, Castille보루를 폭파시키고 성벽잔해위로 공격용타워를 내보내기로 합니다.
8월 18일 무스타파는 Senglia, 피알리는 Birgu 공격을 담당했는데, 발렛트는 너무 영리해서 이 전술에 넘어가지 않고, 참다 못한 무스타파는 땅굴을 폭파합니다.
외부성곽이 무너지자 기사단은 혼비백산하여 후퇴하면서 발렛트에게 퇴각을 요청합니다.
그는 투구를 쓰고는 창을 잡고는 부하들을 이끌고 터키군이 있는 성곽의 무너진 틈으로 뛰어가서 자리를 잡고는 포탄파편에 다리를 다쳤지만 끝까지 자리를 지킵니다.
이 용감한 행동으로 기사들은 용기를 되찾아서 터키군을 격퇴시키고는 깃발을 노획해서 성당에 걸어놓습니다.
계속된 전투는 다음날 새벽까지 이어졌고, 양편모두 화염무기를 사용했기에 대낮같이 밝았습니다.
8월19일 Castille보룰를 지키던 발렛트의 조카가 전투가 중단되자 외곽의 공격용타워를 폭파하기 위해 돌진하다가 그의 화려한 갑옷이 터키군의 시선을 끌게 되어 살해되고, 곧이어 시체를 둘러싼 전투끝에 가까스로 시체는 회수됩니다.
공격용타워는 나무로 만들어지고, 물에 젖힌 가죽으로 둘러싸서 화공이 소용없었고, 예니체니군단이 속에 탑승하여 기습공격에 즉각 대응할 수 있어서 파괴가 어려웠습니다.
성보다 높이 솟아서 방어군을 괴롭히자, 발렛트는 약점이 아래편 기단에 있음을 간파하고는 공병들을 시켜서 공격용타워를 바라보는 성곽 맨 아랫부분에 굴을 파서 대포를 배치하고는 일제사격으로 파괴한 후 성곽을 원상복구합니다.
 
St. Michael요새에는 다른 무기로 공격이 개시되는데, 터키군은 대형폭탄을 만들어서 성곽의 파괴된 틈으로 갖고 와서는 내성벽으로 굴렸는데, 기사들이 도화선이 긴 것을 보고는 다시 굴려보내고 결국 터키군 앞에서 터지는 바람에 막대한 사상자가 발생합니다.
8월 20일 터키군은 점령 못할 경우에 죽기를 각오한 Cheder의 지휘하에 8,000명이 총공격을 합니다.
화려한 복장덕에 집중공격을 받아서 그의 희망대로 전사하게 되고, 시체를 둘러싸고 전투가 벌어지자, 초창기에 St. Elmo섬에 대해 비관적 전망을 하여 겁쟁이라고 생각하며 항상 고민하던 기사인 Cerda가 돌격에 앞장서서 예니체니 군단의 칼에 맞아 전사합니다.
한편 Birgu 외곽의 Castille보루 공격을 위해 2번째 공격용타워가 준비되는데 이번에는 흙과 돌로 기단부가 보강되었습니다.
기사들은 마찬가지로 성벽에 굴을 판후, 특공대를 내보내서 타워를 점령하고는 성벽과 연결하여 2대의 대포를 설치하여 외곽요새로 만들어 버립니다.
8월 23일 저녁에 작전회의가 열리고 기사들은 Birgu의 방위는 주변성곽에 너무 많은 폭약과 땅굴이 있어서 허물어 지기 일보 직전이니 St. Angelo요새로 철수하자고 주장했습니다.발레트만이 반대했는데, ‘만일 Birgu지역을 잃으면 바로 Senglia를 잃게 될 것이며, 또한 St. Angelo요새는 너무나 비좁아서 현지 주민들을 전부 수용할 수 없고, 식수도 부족하여 오래 버틸수 없을 것이다.’
성유물과 기사단의 기록을 옮겨 봤자, 기사단이 전멸당하면 쓸모없는 것이니, 끝까지 현 위치를 사수해야 한다.’ 라고 말하고는 Birgu와 St. Angelo요새를 연결하는 다리를 폭파하고는 배수진을 칩니다.
터키군의 입장
애초에 4주간의 작전을 계획했기에 식량과 탄약이 거의 바닥이 났고, 섬침공에 대비해서 기사단이 모든 가축과 익지도 않은 곡식을 모두 베고, 우물에까지 독을 탔기에 모든 물품은 북아프리카에서 힘들게 수입해야 했습니다.
온종일 포격하는건 꿈도 못꾸고, 돌격직전에만 할 수 있었고, 비록 갤리선에 배치된 여분의 탄약이 있었지만, 만일의 해전에 대비해서 비축해야만 했습니다.
남은 식량은 25일치 밖에 없었고, 북아프리카로부터의 수송선단이 습격당해서 물품공급이 원활치 못했습니다.
만일 겨울을 이곳에서 보낼려면 반드시 Mdina가 필요했기에 전투부대를 보냅니다.
Mdina의 수비대장은 현명한 지휘관이었는데, 고지대에 위치하여 삼면이 낭떠러지에 접한 성곽이지만 병력과 무기가 부족한걸 잘 알았기에, 넘치는 피난민들을 전부 병사로 위장시키고는 성벽에 모든 무기들을 전시해놓고, 터키군 정찰대가 접근해오자, 원거리에서부터 총사격을 개시합니다. 이에 놀란 터키군은 강력한 요새라고 착각하고 곧바로 후퇴합니다.
우여곡절끝에 마침내 9월4일 시칠리총독은 섬에 있던 기사들의 간청에 못이겨서 약 10,000명의 병사들을 거느리고 출항하여 9월6일 섬북부인 Mellieha에 도착하여 병력을 상륙시킵니다.
피알리제독은 공격할 기회가 있지만, 함대보존을 위해 공격을 회피했습니다.
발레트는 터키군포로에게 상륙군이 16,000명이라는 것을 엿듣게 하고는 탈출하도록 방조합니다. 결국 무스타파가 이 정보를 듣고는 철수를 결심합니다.
시칠리총독은 함선을 이끌고는 기사단의 항구에 3발의 예포를 쏘고는 나머지 4,000명의 병력을 다시 데려 오기위해 되돌아갑니다.
상륙한 지원군은 먼저 Mdina로 행군하여 현지 기사단과 합류하고 요새로 다가갑니다.
9월 4일 모든 터키군은 4달간의 포위를 풀고 무거운 대포는 남겨둔 채 철수합니다
St. Elmo요새에 다가간 기사들은 제일 먼저 자신들의 깃발을 높이 게양합니다.
무스타파는 정찰대가 상륙군이 8,000명에 불과하다고 보고하자, 함선을 눈앞에 두고서는 마지막 전투를 하기로 결심하고, 내륙으로 전진합니다.
 
상륙군은 신중하게 고지대에서 대기하려고 했으나, 일부 기사들이 적들을 눈앞에 두고 가만히 있을수 없다고 주장하고는 돌격을 감행하자 전체 부대가 이를 따릅니다.
터키군은 전열이 무너지면서 오직 무스타파와 예니체니군단만이 후위부대로 남아서 철수를 시작합니다.
용감하게도 무스타파는 선두에서 전투에 참여하여 사로잡힐 위기에 쳐하기도 했으나, 일부 터키군의 희생으로 함대가 있는 St. Paul만으로 철수하는데 성공하고, 배를 타기까지 전투를 벌이면서 겨우 15,000명만 탈출에 성공합니다.

무스타파와 피알리제독은 슐레이만대제의 화를 식히기 위해 제일 빠른 연락선을 보내서 패전을 미리 알렸고, 진정이 된 슐레이만대제는 야간에 몰래 상륙해서 사람들의 눈에 띄지 말 것을 지시하고, 내년에 자신이 직접 작전을 지휘하겠다고 다짐합니다.
발레테는 침공에 대비해서 터키군 포병이 위치했던 고지대인 Sciberas 언덕 위에 새로운 요새도시를 짓게 되는데 이 도시는 자신의 이름을 따서 ‘Valetta’ 라 불리게 됩니다.
그는 3년간 요새를 다시 재건하는데 전력하다가 심장발작 후 몇 주 후에 사망합니다.
그의 시신은 Valetta에서 새로 완공된 성요한성당에 매장되고, 그의 친구이자 비서였던 영국기사 올리버 스타키가 비문을 작성합니다.
‘여기 영원한 명예를 지닌 발렛테가 누워있다. 그는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공포였으며 유럽의 방패였고, 야만족을 이 섬에서 몰아낸 후 그가 만든 도시에 최초로 안장된 사람이다.’

1798년 나폴레옹이 이집트원정을 가던 도중 몰타섬에 정박하고는 기사단을 추방하자, 그들은 여기저기 떠돌다가 최종적으로 로마에 본부를 마련하게 됩니다.
주적인 터키가 무너진 지금 그들은 전투대신에 의료활동을 하면서 자신들의 신념을 지켜나가고 있습니다.
현재 78번째 기사단장인 Bertie는 1278년 이후 최초의 영국인으로 바티칸공국과 마찬가지로 일부 국가에 외교관을 파견하면서 주권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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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열심히 달리기